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회장님 공화국'이 되었다. 1970~80년대만 해도 사람들의 꿈은 단순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남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 아니라 내 가게를 가진 '사장님'이 되는 것이 성공의 상징이었다.
경제개발의 열기가 뜨겁던 시절, 시장 골목마다 구멍가게가 생겨나고 작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사장님들이 탄생했다.
그 시절 다방은 지금의 카페와는 차원이 다른 사교 공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리면 다방 종업원은 목청껏 외쳤다. "김 사장님 전화 받으세요!" "박 사장님 전화 왔습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한 다방 안에 사장님이 수십 명이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대기업 총수는 아니었다. 철물점 사장, 목재소 사장, 운수업 사장, 식당 사장, 구멍가게 사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직함보다 책임이 먼저였다. 직원 월급을 걱정해야 했고, 거래처 대금을 맞춰야 했으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사장이라는 두 글자 뒤에는 무거운 삶의 무게가 따라붙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장은 줄어들고 회장이 늘어났다. 산악회 회장. 향우회 회장. 동창회 회장. 노래교실 회장. 게이트볼 회장. 체육회 회장. 봉사단체 회장. 골프협회회장, 심지어 회원보다 임원이 더 많은 단체에도 회장이 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은 국민 한 사람당 회장 하나씩은 보유해야 하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 한때 회장이라는 직함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자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조정하고 조직을 대표하며 책임을 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존칭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회장이 권한의 상징은 될지 몰라도 책임의 상징은 아닌 경우가 많다. 회의는 참석하지 않아도 회장이고, 행사는 얼굴만 비춰도 회장이고, 성과는 없어도 회장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회장은 사라지고 회원들만 남는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직함의 인플레이션이다. 과거에는 사장만 되어도 성공한 사람으로 대접받았다.
지금은 사장 명함을 내밀면 평범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명함에는 총재, 이사장, 상임고문, 명예회장, 중앙회장, 수석회장 같은 직함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명함 한 장의 절반은 이름보다 직함이 더 크다. 어떤 사람은 명함을 펼치면 마치 정부 조직도를 보는 듯하다. 직함은 계속 늘어나는데 이상하게 존경은 줄어든다.
예전에는 직함이 사람을 설명했다. 지금은 사람이 직함을 설명해야 한다. 회장이라는 이름은 많은데 회장다운 사람은 찾기 어렵고, 리더는 넘쳐나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부족하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경제성장과 함께 물질적 풍요를 얻었지만 또 다른 병도 함께 얻은 것인지 모른다.
바로 '직함 중독'이다. 명함 속 두 글자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지하는 사회. 직함이 곧 신분이 되고 계급이 되는 사회. 그래서 회장이 되기 위해 싸우고, 회장이 되기 위해 줄을 서고, 회장 자리를 놓고 갈등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반복된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십은 명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존경해서 따라오는 것이 리더이지, 직함이 있어서 앞에 서는 사람이 리더는 아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사장님들의 땀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은 수많은 회장님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정말 필요한 사람은 회장이 아니다.
직함이 없어도 책임질 줄 아는 사람. 명함이 없어도 존경받는 사람. 그리고 회장이라는 이름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또 하나의 회장이 탄생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회장은 이렇게 많은데 왜 대한민국은 점점 더 리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일까.